통치이념으로 유가사상 자료
통치이념으로 유가사상
통치이념으로 유가사상
통치이념으로 유가사상
1. 중국의 고대 역사적 특징
보통 중국인들은 그들의 역사를 5천년 역사라고 말한다. 그건 역사적 기록, 즉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근거하여 하은주(夏殷周)로부터 역사를 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은대(殷代)의 역사적 실체가 갑골문(甲骨文)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고, 하대(夏代)의 역사도 신석기 용산(龍山) 문화 등을 통해 그 일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므로 약 5천년의 역사라 해서 그리 과장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중국 5천년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때, 중간의 혼란 시기가 상당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중국인들의 생각이나 위정자들의 관념에는 항상 통일국가를 정상으로 보고, 소규모 국가의 난립 현상을 비정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보통 학자들 사이의 견해는 이러하다. 중국이 통일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한자(漢字)라는 언어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건대, 이건 주목할만한 견해다. 중국 한자의 최초의 형태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은대(殷代)에 사용했다는 갑골문(甲骨文)이다.
이 갑골문자에서 발전한 한자가 중국을 통일국가로 유지시키는데 기여했다는 것은 참고할만한 견해이다. 비록 각지의 방언으로 말미암아 서로 경계선을 벗어나면 통역을 하지 않고서는 서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지만 글로 쓰면 서로 다 통하는 이런 한자(漢字)의 역할로 인해 중국이 통일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러나 문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문맹(文盲)이 전 인구의 80%를 육박했던 중국에서 과연 한자(漢字)라는 언어로 인해 과연 통일국가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글자를 모르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80%나 되는데 어떻게 문자(文字)가 광대한 영토의 그 많은 인구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본다면 한자(漢字)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논조는 이 문제의 해답을 제공하는데는 상당히 무리가 따른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문제는 중국의 토양, 황하, 기후 이 세 가지를 고려해야만 원만하게 설명할 수 있다.
중국 문화는 어느 한곳에서 발원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것은 각지에서 고르게 출토되는 각종 유물들을 토대로 판단하면, 비단 황하 유역 뿐아니라 양자강 유역에도 초기 인류가 기거했던 증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구석기 신석기 유물이 중국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각지에 설사 초기 인류가 집단 거주했다 하더라도 비교적 규모를 갖춘 부락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곳이 바로 현재의 서안(西安) 일대이다.
이 서안(西安) 일대는 중국 역대로 11개 왕조가 도읍지를 정한 곳이다. 서안 일대에 도읍지를 정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일대가 황토 지역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의 서안(西安)을 가보면 노란 색에 약간 검은 기운이 감도는 누런 색의 황토가 도처에 보인다. 이런 황토는 저쪽 서북방 황토 고원의 노란 먼지 알갱이들이 계절풍(편서풍)을 타고 고비 사막을 건너 수천만년에 걸쳐 이 일대에 쌓인 것이다. 이 황토 지대는 황하 유역의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있다. 이 황토 지역은 토지가 무르기 때문에 경작에 용이하다. 정착하여 생활하기 좋은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토양 덕분에 서안을 중심으로 역대 11개 왕조가 도읍지를 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황토 지역이 비록 농사에 적합한 토양이긴 하지만, 그러나 황토 지역을 약 500여 킬로 가로지르는 황하는 설령 관개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주기도 했다지만 그러나 약한 황토 지층 때문에 장마철에 접어들면 엄청난 양의 황토 토사를 휩쓸고 내려간다. 보통 물에 먼지의 함유량이 5%만 되도 더러워서 마시지 못한다. 그런데 이 황하는 평상시의 황토 알갱이의 함유량이 30-40%에 달한다. 남미 아마존 강이 홍수때 먼지 함유량이 12%에 달한다고 하는데, 황하의 경우 홍수 때의 먼지 함유량의 최고 기록은 63%까지 기록한 적이 있다. 즉, 음용수로 절대 불가능한 것은 둘째치고, 이 흙탕물이 서해 바다를 향해 흐르는 과정에서 황하의 바닥에 침전되는 황토로 말미암아 강바닥이 계속 높아졌던 것이다. 이게 계속되면 황하가 범람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20세기 초까지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그간 1621차례 황하가 범람했다.
홍수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백성들은 소개(疏開)시켜야 한다. 아울러 전국의 잉여 양식을 신속하게 운반하여 재난지역으로 보급하야 한다. 이런 일들이 만일 소규모 국가가 난립한 경우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기근으로 홍수로 소규모 국가가 무너졌던 일이 허다했다. 우리는 보통 춘추 5패(覇), 전국 7웅(雄)이라 하여 마치 춘추시대에 5개의 나라만 있었고, 전국시대에 7개의 나라만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실은 춘추전국을 통털어 군소 국가가 약 300여개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잘게 나뉘어진 군소 국가의 힘으로는 황토 지대를 500여 km 관통하는 황하(黃河)의 범람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 반드시 중앙집권 하의 대규모 동원을 통해 치수(治水) 사업을 전개하지 않으면 황토 지역에 몰려 있는 대다수 중국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어떠한 혼란의 시기에도 항상 통일을 갈구하게 되었고, 통치자의 입장에서도 통일된 국가의 힘이 있어야만 치수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황토 지대와 황하가 중국을 먹여살린 농업의 토대가 되었지만, 바로 그 황토 지대와 황하의 피해 때문에 중국인들은 중앙집권식 천하 통일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사람이 바로 진시황(秦始皇)이었다. 이어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었다. 진시황의 제국과 한제국의 판도가 현재 중국의 판도와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은 이런 각도에서 주목해야 한다.
이번에는 만리장성에 대해 알아보자. 만리장성은 왜 생겼을까? 이것은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이 북방 이민족이란 유목민족들이다. 이들이 왜 농사를 지을 수 없는가? 그것은
자료출처 : http://www.ALLReport.co.kr/search/Detail.asp?pk=11047672&sid=sanghyun7776&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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